낙엽을 밟으며 문득 - 강길용 수필
가을의 묘미는 낙엽을 밟으며 산행을 즐기며 듣는 바스락 소리일 것입니다. 자연 속에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고 기쁨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낙엽이 지난 세대가 후대를 위해 거름이 되듯, 우리도 열심히 살아가며 후세를 위한 품앗이를 해야 한다는 교훈을 전하고 있습니다.
낙엽을 밟으며 문득
짙푸른 여름을 성큼 지나 누렇거나 갈색으로 타 들어간 잎사귀 몇 개만 나부끼는 가로수가 싸늘함을 느끼게 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가을이 왔었나 보다. 앙상한 가지가 가을은 이미 떠났음을 알려준다. 더불어 사람들의 발걸음도 무척 빨라졌다. 종종걸음에 옷깃을 세운다. 움츠러든 어깨, 호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가는 우스꽝스런 모습이 종종 눈에 들어온다. 두툼한 무스탕의 옷깃에 탐스런 털이 바람에 춤을 춘다. 바야흐로 겨울이다.
어제는 늦잠에서 부시시 깨어나 대충 씻고 수락산을 다녀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산을 오르는 설레임이 앞서간다. 차분한 발걸음을 옮겼다. 주위엔 숱한 산사람들이 울긋불긋한 차림으로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걷고 있다. 땀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고, 낮술을 마신 탓인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어른들도 보인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그 험난한 산길을 잘도 걷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참으로 귀엽다.
그런 사람들 속에 끼어 빈 손, 빈 몸으로 오르는 나의 모습이 보인다. 가끔 내 발 밑에서 바스러지는 낙엽의 느낌이 좋다. 참나무나 단풍나무, 개버즘나무의 잎사리들이 겹겹이 쌓여 등산로의 가장자리를 채우고 있다. 그것을 밟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난다. 그 소리에 취해 자꾸 가장자리로만 발길이 옮겨진다. 바람이 휭하니 불었다. 낙엽들이 이리저리 흩어진다. 그러다간 금새 다른 곳에 자리를 틀고 쌓인다.
그 뒤로 먼지도 풋풋이 날리다가 사람들을 휘감아 돌고는 낙엽 위로, 바윗돌 위로, 나무 위로 또 내려와 쌓인다. 그럴 때마다 등산객들은 멈칫거리며 고개를 돌려 먼지와 맞바람을 피한다. 그 속엔 나도 끼여 있음을 느낀다. 한 무리의 웅성거림이 바위 위에서 들린다. 김밥과 음료수를 펼쳐 놓고 열심히 먹으며 집안에서 있었던 일, 직장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모양이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이야기 속엔 겸손이 베어 있다. 산이 말없이 나눠주는 정감과 가르침을 받은 탓이리라.
그들을 뒤로하고 생각을 달리하며 위로 위로 올라갔다. 가팔라진 돌층계가 다가오고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그럴수록 정상이 눈앞에 조금씩 가깝게 보인다. 맑게 갠 하늘 아래에 우뚝 솟은 화강암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그 반질거리는 바위가 나를 부르고 사람들의 훈훈한 가슴을 부른다.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가파른 바위를 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더욱 무뎌진다. 서로 끌어 주고 밀어 주며 안전을 위해 묶어 놓은 밧줄을 잡고 오르는 이들의 진지함 속으로 따뜻하기만 한 정이 새록새록 자란다.
때로는 힘겨운 소리도 들리고,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농담을 건네는 소리도 들린다. 나는 그저 말없이 산과 호흡하고 싶었다. 비탈이 짙으면 짙은 대로 평평하면 평평한 대로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늘 긴장하고 산에 대한 겸손함을 남기며 그냥 오른다. 정상이 눈앞에 보인다. 환희 같은 것이 회오리바람처럼 한바퀴 휘돌아 간다. 객들 틈에 끼어 손을 입에 대고 메아리를 불렀다. 산의 대답이 이어진다. 마치 희미하게 꺼져 가는 불빛처럼 잠시 후 사라지지만 정겹기만 하다.
산을 내려오면서 또 낙엽을 밟는다. 같은 소리가 들린다. 때로는 새들의 울음소리 같기도 하다. 부서지는 느낌이 경쾌하다. 그리고 미끄러질 듯 반질거리는 표면 반사도 좋다. 객들 가운데 그 반들거림에 미끄러지며 비명을 지르기도 하였지만 두려움의 비명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희열 같은 것이었다. 밟고 지나온 낙엽들은 말이 없다. 낙엽은 어쩌면 속으로 부서짐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을 것 같다.
등산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블록 위로 노랗게 떨어진 은행 나뭇잎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밟혔는지 물집이 생겼고, 이리저리 찢긴 모습이 대부분이다. 그 모습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낙엽의 의미는 무엇일까. 문득 다음에 피어날 꽃이나 새순을 위한 '품앗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옛날, 아니 지난해의 낙엽이 썩어 거름으로 나무를 자라게 하였듯이, 마치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아버지에게서 나에게로 이어졌듯이. 그것이 낙엽의 의미이자 우리들이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의미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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