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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해설, 머물지 않는 바람처럼: 빈 지게에 싣는 달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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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지 않는 바람처럼: 빈 지게에 싣는 달빛 머물지 않는 바람처럼 1. 원문과 독음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形 高下相傾 音聞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 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夫惟弗居 是以不居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고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형 고하상경 음문상화 전후상수 시이성인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만물작언 이불사 생이불유 위이불시 공성이불거 부유불거 시이불거 2. 해석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알지만, 이는 (그에 반대되는) 추한 것이 있기 때문일 뿐이다. 모두가 착한 것을 착하다고 알지만, 이는 착하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므로 있음(有)과 없음(無)은 서로 낳아주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어주며, 길고 짧음은 서로 견주어지고, 높고 낮음은 서로 기울어지며, 노래와 소리는 서로 어울리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이 때문에 성인(聖人)은 무위(無爲)의 일에 처하고,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한다. 만물은 생겨나도 (성인은) 말 한마디 없이 주재하지 않으며, 낳으면서도 소유하려 하지 않고, 위하면서도 뽐내지 않으며, 공을 이루어도 그곳에 머물지 않는다. 대저 머물지 않으므로, (그 공이) 떠나가지 않는 것이다. 빈 지게에 싣는 달빛 저기 산마루에 걸린 구름을 봅니다. 바람이 부는 대로 흘러가다가, 이내 흩어져 버립니다. 구름은 자신이 아름답다고 소리치지 않습니다. 그저 푸른 하늘이라는 빈 여백이 있어, 구름의 흰 자락이 눈부시게 드러날 뿐이지요. 노자(老子) 님께서 말씀하셨다지요. 세상이 모두 아름답다 하는 것을 아름답다 여기는 순간, 이미 추한 것이 생겨난다고 말입니다. 참으로 무릎을 치게 만드는 이치입니다. 우리는 늘상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에 마음을 뺏기고 살아갑니다. "내가 더 곱다", "내가 더 낫다" 하며 키를 재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긴 것이 있어야 짧은 것이 드러나...

노자 해설, 뜰 앞의 나무는 이름이 없다: 우리가 잃어버린 '침묵'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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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 앞의 나무는 이름이 없다: 우리가 잃어버린 '침묵'에 대하여 침묵 속에서 피어나는 현묘함 1. 원문 도가도 비상도 (道可道 非常道) 명가명 비상명 (名可名 非常名) 무명 천지지시 (無名 天地之始) 유명 만물지모 (有名 萬物之母) 고상무욕이관기묘 (故常無欲以觀其妙) 상유욕이관기요 (常有欲以觀其徼) 차양자 동출이이명 (此兩者 同出而異名) 동위지현 (同謂之玄) 현지우현 (玄之又玄) 중묘지문 (衆妙之門) 2. 해석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영원불변한 도가 아니요, 이름을 이름 지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이름이 아닙니다. 이름이 없는 것(無名)은 천지의 시작이요, 이름이 있는 것(有名)은 만물의 어머니라 합니다. 그러므로 늘 욕심이 없으면 그 오묘한 본질(妙)을 보게 되고, 늘 욕심이 있으면 그 나타난 껍데기(徼)만 보게 됩니다. 이 둘은 같은 곳에서 나왔으되 이름만 달리 붙은 것이니, 이를 아울러 현묘(玄)하다 이릅니다. 현묘하고 또 현묘하니, 이는 곧 모든 오묘함이 드나드는 문(門)입니다. 해설: 이름 없는 것들을 위하여 창밖 뜰에 서 있는 늙은 나무 한 그루를 바라봅니다. 우리는 저것을 '나무'라 부르고, 봄이면 피어나는 것을 '꽃'이라 이름 붙입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저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기 전에도 그것들은 그저 그곳에 그렇게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정의를 내리려는 것은, 이 광활하고 알 수 없는 우주를 우리의 작은 손바닥 안에 쥐어보려는 가련한 욕심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노자(老子)가 말한 '도(道)'란 결국 이러한 인위적인 구분 너머에 있는,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생명의 숨결 같은 것이 아닐런지요. 우리는 너무나 많은 이름 속에 파묻혀 살아갑니다. 나를 규정하는 직함, 남들이 나를 평가하는 평판, 그리고 내가 세상에 내보이고 싶은 모습들... 그러한 '이름(名)'과 '욕심(欲)'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