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리는 봄비 - 강길용 수필
이 글은 IMF 시기의 경제적 어려움과 그로 인한 사회적 분위기를 봄비에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실직과 불안감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하며,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 백일몽을 꾸는 이들의 심리를 탐구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내리는 봄비
겨울엔 눈이 많이 내렸다. 그러던 것이 어느덧 비로 바뀌어 꽤 자주 내린다. 얼마전 내렸던 비를 봄비라고 불렀던 기억이 난다. 봄비라는 말 한마디에 희망을 담고 꿈을 담으며 전화로 인사를 나누어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밝은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었다. "어떻게 지내냐"는 물음에 "요즘 죽겠어요"라는 말을 듣고나면 왠지 기분이 쓰라리다. 타인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어느덧 자신의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불현 듯 드는 모양이다.
아직은 버텨낼만 하고, 또 버텨낼 자신도 있겠지만, 자신의 일인 것처럼 조심스럽다. 그 뒷면에는 엄살을 떨어야 손을 내미는 사람이 덜할 것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직이나 실업에 대한 불안감이 가장 큰 이유일 게다. 언제부턴가 의미도 모른 채 IMF를 들먹이며 깍쟁이짓을 하는 아이들이 있는데 어른들은 오죽할까.
우리들의 생활 습관을 여지없이 바꿔 놓으며, 새로운 삶의 패턴을 갖기를 너그러운 듯 비웃는 듯 몰아 붙이는 IMF라고 하는 알파벳 세글자는 올 한해 동안 많은 변화를 가져 올 것같다. 아이들의 말에서부터 어른들의 움츠린 어깨위에 올려지는 것은 물론이다. 작은 것 하나라도 소중히 해야 한다는 씀씀이에 대한 가치관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는다.
어느 한쪽에서는 소비를 하지 않아서 우리 나라 경기가 위축되면 "공멸한다"는 위험론을 들고 나와 위협도 해 보지만 이미 움츠러든 소비는 햇살 앞에서도 기지개를 펴지 않는다. 또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약동하는 마음의 봄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 마음은 이미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고 있지만, 현실은 여전히 제자리 걸음인 걸 어쩌란 말이냐.
가끔 '백일몽(白日夢)'이란 것을 꾼다는 말을 듣는다. 백일몽이란 밤이 아닌 한낯에 꾸는 꿈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바라보면 마치 미친사람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그 꿈을 꾸는 사람은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며 하늘을 나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미소를 흘린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누군가 어깨를 툭 쳐도 알아채지 못한다. 때로는 그 꿈 속의 무언가를 잡으려고 일어서서 허공을 휘젓는 경우도 있다.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한낯에 꿈을 꾸고, 또 현실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환상과 착각에 빠져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 속에선 어김없이 억만장자가 되고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하여 한아픔 선물을 사 들고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멋진 자가용을 타고,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날 수도 있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치 당당한 폼으로 즐거운 노래를 마음껏 부르기도 했을 것이다.
깨어나 현실로 돌아오면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그 없음에 공허함을 느끼고, 허기진 듯한 느낌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아쉬움도 남을 것이다. 잠시 더 백일몽에 잠겨들고 싶겠지만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어 가며, "꿈은 꿈일 뿐이야"라며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사람들이 요즘 우리 주변에 있다고 한다. 그들의 꿈은 언제나 황량한 벌판에서 깨어날 것이다. 빈손으로 터벅터벅 무거운 어깨를 늘어뜨리며 집을 향하여 회사를 향하여, 때로는 술집을 향하여 걷고 또 걸어 갈 것이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은 옷깃마져 축축히 젖어 들고 차가운 빗방에 꿈마저 꾸지 못할지도 모른다. 봄이 주는 따사로움도, 봄이 주는 희망도, 봄이 주는 축복도 봄비가 실어 오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도 할 것이다. 남몰래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몇 년 뒤에 다시 되돌아오고 싶은 생각도 들 것이다. 그 때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즐거운 노래를 부르며 백일몽이 아닌 꿈을 꿀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그러나 지금 우리들 곁에는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듯이 희망이라는 두글자를 가슴에 새기고 당당히 걸어야 할 미래가 있다. 당장 한숨만 쉬면서 봄비를 맞아 꾸지 못한 백일몽의 환상에서 깨어나야 하지 않을까. 그 옛날 힘겹게 넘겼던 숱한 고난의 세월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오늘의 봄비는 언 땅을 비집고 솟아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솟아오르는 용기의 빗물이라고 생각하며 기지개를 켜 보자.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