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걸음마를 배우자 - 강길용 수필
경제적 어려움, 정치인과 권력층의 부패, 가족 해체 등의 문제로 인해 희망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말고 갓난아이처럼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어린 시절의 희망과 의지를 되찾아 다시 일어서 힘차게 웃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다시 걸음마를 배우자
겨울 날씨 답지 않게 영상의 기온을 유지하고 있다. 예년 같으면 따뜻한 분위기를 피부로 절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올해의 겨울이 보기 드문 온기(溫氣)로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실로 차가운 동토(凍土)와 다름이 없다. 숱한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어머니와 딸들이 험난한 세상 속으로 휘말리고 있다. 마음의 겨울은 계절의 변화에 따른 겨울의 추위보다 더 절박하게 동결(凍結)로 다가온다.
또 희망찬 전주곡을 울리며 시작했던 대통령 당선자의 나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오랜만에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를 이루었다는 자부심도 얼어붙은 가슴을 녹이지 못하고 있다. 화려한 경제지표로 장식하던 방송과 신문의 치장도 볼 수 없다. 어디를 둘러봐도 희망이라는 단어를 찾아지지 않는다. 언제 자신이 거리로 내몰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춤츠러든 가슴은 좀처럼 열릴줄 모른다. 서로가 제 몫을 챙겨 곳간을 늘이려 발버둥친다.
이렇게 허망한 가슴을 들여다보면 어김없이 약속과 믿음이 비어있다. 정부는 날마다 대책을 내 놓는다고 하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만한 이유는 충분히 있다. 어렵다는 말을 하면서, 허리띠를 졸라매라는 말을 하면서, 정작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주체들은 여전히 제멋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 어떤 사람들인가.
남들이야 길거리에서 굶주리며 죽어 가든지, 직장을 잃어 방황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든지 '내 알 바 아니라'는 듯이 흥청거리는 부류들이 있다. 가장 큰 책임을 느껴야 할 고위 공무원들, 국회에서 법률심의 하나 제대로 못하고 언성만 높였던 한량들, 남의 아이는 절망에 빠져 있거나 말거나 내 아이만 잘 되면 된다는 식의 이기적이고 오만한 금고가 가득 찬 부모들, 교통질서를 지키지 않는 운전자들을 봐주면서 뒷돈을 챙긴 경찰들, 말만 앞세우고 해법을 내놓지 못하는 언론 종사자들, 돈만 벌면 된다는 천민 자본가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지금도 어디선가 고급 양주를 마시고, 고급 외제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목에 힘을 주면서 팁으로 흥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불법을 묵인해 준 대가로 받아 챙긴 돈이 들통날까 전전긍긍하면서도 불우 이웃돕기 성금에 한푼 내지 않는 파렴치함을 자랑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머리가 땅에 다다르도록 사죄하며 반성의 눈물을 흘려야 할 대통령과 그의 추종자들도 지금 따뜻한 잠자리에 들고 있을 것이다. 서민의 삶을 짓밟으면서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자들은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미덕인 상부상조는 어디에 있는지 그 빛이 희미하기만 하다. 나만 좋으면 다 좋다는 식의 이기주의만이 성행하고 있다. 청소년들은 참다운 부모의 사랑과 가족의 겸허하고 겸손한 정신과 사랑 대신 돈으로 하는 치장과 멋을 배웠다. 지금 어른들은 그들에게 버릇이 없다고 말하지만, 이는 어른들 스스로가 뿌린 씨앗을 제대로 가꾸지 못한 게으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스스로 살아가야 할 나이에도 집안에서 감싸 돌고, 결혼을 하면 살림을 모두 장만해서 풍족하게 살도록 만들어 준다. 그러니 성인으로써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할 나이지만 부모에 의지하는 습성을 버리지 못할 수밖에 없다. 부모라는 언덕이 사라지면 자포자기하거나, 다른 집 아이를 유괴하여 쉽게 돈을 벌려고 할 뿐이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얻어야 한다는 의지를 잃은 아이 같은 어른이 되고 만다.
올해같이 차디찬 마음의 겨울을 맞이하여서 패배주의에 빠지고, 다시 일어서겠다는 의지보다는 '누구 탓에 그렇게 됐다'는 식의 한풀이에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옛말이 새삼 가슴에 침잠하는 겨울이다. 눈보라 몰아치는 차디찬 겨울보다 더 차게 얼어붙은 우리들 가슴에 자꾸 쌓여 가는 좌절감이 슬프게 한다. 가진 자들의 오만과 독선에 대한 분노보다도 더 흔들리며 방황하는 오늘의 패배주의가 한없이 슬프기만 하다.
그러나 희망을 가져야 한다. 갓난아이는 걸음마를 배우다 쓰러져도 울지 않는다. 이제 그 어린 시절로 돌아가 어린아이의 희망과 믿음, 그리고 의지를 다시 한번 닮아 보자. 그리하여 뛸 수 있게 되었을 때 보란 듯이 힘차게 웃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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