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산책 - 강길용 수필

서울의 다양한 모습과 사람들의 일상을 묘사합니다. 명동과 종로를 산책하며 경험한 복잡한 도시 풍경, 땡볕 아래서의 피로, 그리고 여러 사람들과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서울의 다채로운 삶을 그립니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람들, 비둘기를 쫓는 아이들, 구걸하는 남자, 그리고 거리의 풍경을 생생하게 담아냅니다. 산책 중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과 행동을 통해 서울의 복잡하면서도 활기찬 일상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후의 산책 - 강길용 수필



오후의 산책


서울의 얼굴은 날마다 변한다. 이쁘게도 변하고 때로는 흉물스럽게도 바뀐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있는 밤과 썩은 냄새가 코끝을 마구 찔러대는 뒷골목이 공존한다. 싸우는 사람들이 많았다가, 웃고 즐겁게 악수하고 서로를 용서하는 이들이 함께 한다. 그 가운데서도 서울의 중심이었던 명동과 종로거리는 어느 시간이나 볼거리를 늘어 놓은 시장과 같다. 재래시장이면서 백화점이고, 부자이기도 하고 게걸스런 거지와도 같다. 그것이 서울의 서로 다른 여러 얼굴이다. 


그런 거리를 걸어 보았다. 탑골공원 앞에서 종묘까지, 그리고 길 건너 세운상가 앞에서 종로서적까지. 이리저리 마냥 두리번 거리며 무더운 한낮에 산책을 나섰다. 어깨에 가방 하나 둘러메고 말이다. 사람들의 달구어진 몸짓이 부대끼며 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발걸음이나 발자국 소리도 제각각이다. 뒷모습도 다르고, 머리카락의 모양이나 굵기도 틀리다. 그러나 모두들 바빠 보인다. 다만 서로의 어깨를 감싸안고 극장으로 들어가는 젊은 연인들이나 할 일없이 서성이는 구걸꾼들이 여유로울뿐이다. 


땀이 흐르는 것을 식히기 위하여 혼란스럽기만한 종묘공원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아스팔트로 덮인 바닥에서 솟구치는 열기를 맞으며 여러 표정들을 살핀다. 아이들이 한움큼 비둘기 모이를 던진다. 비둘기들이 떼지어 모였다. 아이들을 따라간다.  아이들은 그 모습이 신기한지 달아나며 조금씩 던져 준다. 어느덧 모이를 모두 뿌린 모양이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비둘기들이 파드득 날아서 나뭇가지에 앉는다. 이 나무 저 나무를 옮겨다니다 땅으로 찔끔거리며 배설을 한다. 


비둘기가 바삐 움직이는 틈에도 속살을 조금씩 드러내며 더위를 몰아내려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짜증이 잔뜩 섞여 있다. 부채를 들고 이리저리 흔든다. 그래도 모자라는지 매점으로 걸어가 아이스크림도 사고, 커피도 사고, 과자도 사서 들고 제자리로 돌아온다. 자리에 앉자마자 포장을 뜯고 누가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인지 숨가쁘게 먹어 치운다. 아이스크림이 녹아 흘러내려 옷으로 떨어졌는지, 손으로 오지랖을 닦는다. 손도 끈적거리는 모양이다. 수돗물을 틀고 손을 열심히 씻는다. 


담배 하나를 피워물고 잠시 여유를 찾으려 했다. 먼 앞자리에 앉았던 몰골이 꼬질거리는 남자가 걸어 온다. 앞에 서서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마주볼 수 있도록 들이민다.  그리고는 묻는다. 


"담배 한가치만 빌립시다" 


목소리가 제법 용감하게 들린다. 오른손에 들린 담배를 거꾸로 한번 툭 쳤다. 마침 두가치가 같이 나온다. 


"두가치 주시면 안됩니까?" 


그 남자가 말한다. 마치 주지 않으면 무슨 일이라도 벌일 태세다. 두가치를 주었다. 받아들고 가면서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다. 자기가 앉았던 자리에 앉는다. 옷은 어디에서 살았는지 흰 옷이 검은 색으로 보일 정도다. 수염을 안깎아서 까칠거린다. 얼굴도 세면을 하지 않은지 몇 달은 돼 보인다. 그 사람은 담배를 다 피우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차도와 맞닿은 인도로 간다. 뒷모습을 보며 가만히 웃었다. 


어디선가 징소리, 북소리, 꾕과리소리와 함께 구성진 타령이 들린다. 어떤 사람이 신문을 펼쳐서 하루를 읽는다. 그렇게 한참 흐른 시간 뒤에 그는 신문을 하나씩 펼치더니 잔디 밭에 정성을 다해 깐다. 그리고는 그 위에 주저 앉는다. 잠시 뒤엔 뒤로 벌렁 눕는다. 이내 잠들었는지 꼼지락거리지도 않는다. 아마도 하루를 담은 종이와 그 위에 깨알같이 적힌 글씨들은 잠자리만큼의 의미에 지나지 않은 모양이다. 어쩌면 하루 위에 다소곳이 누워 잠자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둠이 엷게 깔린다. 


공원 그늘아래는 몇사람씩 둘러 앉아 이야기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이야기를 하다 말고 일어서서 어디론가 자박걸음으로 걷는다. 게임을 하는 곳으로 가서 모형 M16 소총을 잡아 본다. 이리저리 매만지다가 천원짜리 지폐 두장을 넣고 사격을 시작한다. 가늠구명을 통하여 가늠자를 예리한 눈초리로 바라보다가 천천히 방아쇠를 당긴다. 맞았다. 목표물이 쓰러진다. 그 때마다 즐거워한다. 주인도 덩달아 싱글거리는 얼굴이다. 옆에 서서 말리기만 하던 여자친구도 신기한 눈으로 숨을 죽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씩 모여들고, 남자들은 저마다 총을 잡는다.  그리고는 값싼 인형 하나씩 손에 들고 총총히 떠나간다. 목표물이 쓰러질 때마다 '살았다'는 희열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사람의 동물적 본능인가 보다. 


네온사인과 차들의 몸짓으로부터 불빛이 반딧불만큼 켜진다.  경적소리가 가끔씩 고막을 찢을 듯한 소리로 다가온다. 아스팔트위로 화끈거리는 열기를 아낌없이 내뿜고는 제 갈길을 달음질친다. 그 안에선 무엇이 그렇게 흥겨운지 음악을 틀고 온 몸을 흔들며 질주하는 세대들의 표정에선 그 흔한 '경제 살리기'라는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그들의 표정에는 주어진 사랑을 찾아 방황하는 흔들림이 있었다. 종로가 깊은 어둠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러나 사람들의 가슴은 더 빠른 심장의 고동을 울리는 것처럼 보인다.  왜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걸어야 하는지를 생각하며 걸어 본다. 끝내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지하철을 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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