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염한 한강 - 강길용 수필
한강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요염하고도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한낮의 더운 여름에는 아낙들의 빨래터, 아이들의 놀이터, 어른들의 목욕터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한강은 역사적으로 병사들의 피와 시인의 음율,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 고통의 눈물 등 다양한 감정을 담고 있습니다. 밤이면 한강은 불야성으로 변하며, 사람들의 사랑과 추억, 여유로움을 품고 흐릅니다. 이러한 한강은 서울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요염한 한강
누군가 한강을 가리켜 '요염하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들으며 무엇이 한강을 요염하게 하고 나의 기억과 꽤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강을 건넜고, 그 숱한 세월 푸른 빛 곱게 입고 흘러흘러 서해로 떠난 흔적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낮의 뜨거움이 몰아치는 옛날 어느 여름엔 아낙들이 빨래를 하고, 아이들은 모여서 물놀이를 즐겼고, 어른들은 고기잡이나 목욕했을 한강, 수많은 병사들이 적과 싸우다 죽음을 피로 받아 흘려 보냈을 한강, 어느 시인의 입에서 불려지던 멋드러진 음율을 잔뜩 머금은 한강, 헤아릴 수 없을 만치 많은 연인들이 속삭인 사랑이야기를 엿들었을 한강, 고통이 가슴을 찢는 날이면 찾아온 이의 마음을 적셔주었을 한강, 기적(奇蹟)을 만들어 내던 어느날 잘 쌓은 제방위로 예쁘게 자란 꽃들이 나비를 불러 노는 한강!
쇳소리 내며 달리는 전동차, 질주하는 자동차들의 경주, 그 모습을 보며 잠시 눈감아 본다. 수많은 사연과 세월들의 외침, 노랫소리가 꿈이나 환영처럼 스쳐지나 갔다. 환청처럼 머리를 흥겹게 하고 지나는 기쁨의 환성도 들렸다. 한강은 그 모든 것을 검푸른 모습 위로 아리랑 곡조로 만들어 띄우며 흐른다. 잔잔한 흐름 속으로 깊고 고독한 삶을 길게도 이어왔던 한강이 뿜어내는 굿거리 장단에 나의 영혼이 어우러져 춤을 추고 있다. 오랜 세월을 흐르며 그 곁에 터전을 마련한 사람들에게 희망이었다가 절망이기도 하였을 여울살에서 흐르는 물은 막으면 막을수록 더 높이 넘쳐흐른다는 진리를 찾게 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젊음에게는 애국심이란 것을 심어 주었고, 백사장 길다란 시절에는 야망을 꽃피게 하였으리라.
이렇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담고 흐르는 한강을 난 또 얼마나 많이 건넜을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서너 번씩 건너며 늘 '한강이 없었다면 서울의 삶은 얼마나 삭막했을까'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탁 트인 곳이 없었던 서울, 그래서 모든 꿈이 한강이 되어 멀리 바다로 흘렀으리라. 강을 건너며 푸르게 낮은 곳으로만 흐르도록 되어 있는 물이 모여 '하나'라는 의미, '넓다'는 의미, '크다'는 의미, '깨끗하다'는 의미를 고스란히 갖고 있는 한강 앞에서 나는 '사람답게 살기'를 바라고 있었는지 모른다.
밤이면 한강은 또 다른 모습으로 변신을 거듭한다. 밤이 되기 전 짙은 노을은 넓은 품안 가득히 황금빛 물살이 넘실거리게 한다. 마치 한복 입은 여인네의 치맛자락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만 같다. 그렇게 밤을 맞은 한강은 어둠 속에 묻히지만, 가로등이 켜지고 내달리던 자동차의 불빛이 비추기 시작하면 불야성을 품에 안는다. 그 불야성의 도시는 한강 속에서 춤을 추며 한껏 환희를 들떠 잘게 떨린다. 그 모습에 한번 취하면 그 자리에 오래도록 사람들을 서 있게 만들고야 만다. 한강이 주는 유혹의 눈길을 피하지 못하고 추억 속의 님처럼 받아들인다.
고수 부지로 몰려나온 가족들의 이야기가 구수하고, 아이들의 외침이 사람 사는 땅임을 느끼게 한다. 길게 늘어선 깃발들이 나부끼고, 유람선의 불빛 속에서 낯선 사람들을 향하여 손 흔들게 하고 큰 소리쳐 대답하는 정겨움과 여유로움의 시간으로 이끌어 간다. 그때만큼은 하나의 마음으로 서로를 그리워한다. 한낮엔 삶의 터전에서 서로의 얼굴을 맞대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사람들도, 한 여름밤의 한강변에선 마음을 연다. 또 시원한 바람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야 함을 알게 한다.
그 무렵이면 연인들의 발걸음도 잦아진다. 서로의 눈길을 마주보며 사랑을 확인하고, 한강 물만큼 넓은 마음으로 서로를 아껴 줄 것을 맹세한다. 맞잡은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히 적셔져도 놓치지 않는다. 아니 더 큰 힘으로 마주잡는다. 때로는 강가에 앉아 소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진한 키스를 한다. 그 오랜 마주침 속에서 사랑이 더 깊어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한강은 도시를 품고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이토록 맛깔스럽게 한다. 사랑을 나누는 곳으로, 더위를 식히는 곳으로, 이별을 하는 곳으로, 멱을 감는 곳으로, 꿈을 키우는 곳으로 그렇게 오랜 세월을 흘렀을 것이다. 요염하다고 했던 사람의 마음처럼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며 차들의 기나긴 꼬리가 서로를 애무(愛撫)하며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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