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눈물 - 강길용 수필집
소개할 수필은 여자의 치장과 아름다움에 대한 글입니다. 청소년들은 친구나 연예인을 따라 꾸미고, 성인은 독특함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외모에 의존하지 않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지닌 친구가 있습니다. 젊음을 잃은 후 장식에 의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시인 홍윤숙은 "장식론"에서 표현했습니다. 주부들은 육아와 가사로 젊음을 잃고, 잔주름과 상실감에 눈물을 흘립니다. 젊음의 순수한 아름다움은 어떤 장식으로도 채워질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여자의 눈물
길거리를 나서면 나이가 많거나 어리거나 할 것 없이 치장(治裝)에 모든 사람들이 익숙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여자들은 물론이고 남자들도 자기를 가꾸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사람이기 때문에 더 아름답게 보이고, 더 멋있게 보이려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 아닐까 한다. 그렇지만 그 방식만은 시대에 따라서, 나이에 따라서 제각각이다.
청소년들의 꾸미기는 한층 요란스럽다. 친구들의 모습을 보고 멋있다고 생각되거나, 예쁘다고 생각되면 거의 그대로 모방한다. 때로는 연예인 따라 하기도 하고, 주위에 있는 성인들 가운데 마음에 드는 옷이나 머리 모양을 보면 언제든지 모방하고야 만다. 물론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 못하면 그냥 마음속으로만 품고 살뿐이다.
나이가 들고나면 이러한 모방의 심리는 조금 다르게 나타난다. 우선 다른 사람과는 무언가 다른, 독특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다. 다른 사람과 다르게 보이기 위해, 보다 많은 돈과 시간과 정성을 들인다. 음식점 출입이나 커피숍 출입도 보통 사람들이 가는 곳보다는 느낌이 살아 있는 곳을 주로 찾는다. 옷을 입는 일도 달라진다. 무조건 모방에서 몸의 맵시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골라 입는다. 얼굴에 화장도 하고, 손가락엔 반지도 몇 개 낀다. 하루에 몇 번씩 거울을 들여다보고 때로는 그 속에서 백설공주 같이 아름다운 얼굴이 화들짝 나타나 놀래 주기를 꿈꾸기도 한다.
이렇게 치장에 열심인 시대적인 분위기와는 다른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친구가 있는데 한번은 '왜 화장을 안하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난 선택받는 여자이고 싶지가 않거든. 남자도 다른 어떤 것도 내가 선택할 거야."
선택받는 여자이고 싶지 않다는 말, 어쩌면 그 말 속에는 선택되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도 함께 들어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대부분 외모에 매달려 속으로 살아나는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찾으려 하지 않는 시대, 그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나의 눈에는 그 친구가 칠월의 풀잎 같아 보인다. 겉으로 치장을 하지 않고, 가슴 깊은 곳에 삶을 차곡차곡 이쁘게 채우며 환하게 웃을 수 있는 당당함, 그 모습이 귀금속으로 장식하거나, 화려하게 꾸며 입은 옷, 값비싼 외제 화장품으로 덧칠한 사람들 보다 몇 배는 아름답게 느껴진다.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주부가 되면 그 숱한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熱望)도 조금은 달라진다. 마음은 있어도 혼자일 때만큼 공을 들이지 못한다. 대신 마음 속에 속앓이로 채운다. 시인 홍윤숙님은 장식의 의미를 '장식론(裝飾論)'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여자가/장식을 하나씩/ 달아 가는 것은/ 젊음을 하나씩 잃어 가는 때문이다.
'씻은 무우' 같다든가/ '뛰는 생선' 같다든가/ (진부한 말이지만)/ 그렇게 젊은 날은/ '젊음'하나만도/ 빛나는 장식이 아니었겠는가.
때로 거리를 걷다보면/ 쇼윈도우에 비치는/ 내 초라한 모습에/ 사뭇 놀란다./ 어디에/ 그 빛나는 장식들을 잃고 왔을까/ 이 피에로 같은 생활의 의장들은/ 무엇일까.
안개 같은 피곤으로/ 문을 연다/ 피하듯 숨어 보는/ 거리의 꽃집/ 젊음은 거기에도/ 만발하여 있고/ 꽃은 그대로가/ 눈부신 장식이었다.
꽃을 더듬는/ 내 흰 손이/ 물기 없이 마른/ 한 장의 낙엽처럼 쓸쓸해져/ 돌아와 몰래/ 진보라 고운/ 자수정 반지 하나 끼워/ 달래어 본다.
홍윤숙님은 그저 젊음이 가장 아름다운 장식(裝飾)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젊음을 잃은 뒤엔 자신도 모르게 피에로처럼 장식에 익숙해지고, 그것은 또 하나의 '잃음'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하나를 잃으면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하는 사람의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사람들이 '잃은 것'을 되돌려 받기 위해 장식을 하는 것도 그런 이유는 아닐까. 잃는 다는 것과 얻는 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잃어버린 젊음을 찾기 위해 '자수정 반지'와 같은 장식을 끼우면 달래질 수 있는 것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만큼 젊음이 지니는 순수의 아름다움은 그 어떤 장식으로도 대신 채워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주부들이 아이를 낳고, 기르고 나서 시간이 남을 때면 그렇게 혼자 울먹이는 지도 모른다. 아무도 되돌려 줄 수 없는 시간들 앞에서 하나씩 늘어가는 잔주름, 그리고 '잃음'에 대한 상실감을 채우지 못해 몰래 울부짖을 것이다. 또 불면의 밤이 더 괴롭고, 장대비가 내리면 가슴이 시려 오고, 그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남편이나 아이들이 야속해지고, 눈물이 두 볼을 타고 소리 없이 흘러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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